가문인물가문의 인물
가문의 인물
제목 영록대부 밀직사자 오언
작성자 관리자 [2021-07-06 09:28:28]
읽음횟수 354
첨부파일
첨부된파일갯수 : 1
1545637916&&000.jpg

밀직사사(密直司事) 휘 오언(諱 吳彦) 천장(遷葬) 사실전말(事實顚末) 

고려조(高麗朝) 영록대부(榮祿大夫) 밀직사사(密直司事) 동복오공(同福吳公) 휘(諱) 언(彦)은 시조(始祖)오영(吳寧)이 조업(肇業)한후 8세손으로 상서공파(上書公派)안산(安山)종문(宗門)의 종조(宗祖)이시다. 

공(公)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밀직사사(密直司事), 병마사(兵馬使). 양광도(揚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역임하시었다. 

왜국(倭國)의 해적(海賊)이 우리나라에 노략질 하러온것은 유사(有史)이전 부터이다. 

왜구(倭寇)의 침공과 약탈이 계속되어 전라, 충청. 경기지방까지 미치고, 그 피해가 확대될때 고려말 우왕(禑王)은 국력이 쇠락하여 왜구의 침공을 격파할 힘이 없을때 공(公)이 홀연히 나아가 수차례에 걸쳐 왜적을 무찔러 대첩을 거두고 영록대부 밀직사사에 봉해졌으나 고려말 조신(朝臣)간에 신. 구대립이 격심 하였을때 공(公)은 최영(崔瑩), 이색(李穡), 변안렬, 우현보등에 속하여 신 세력인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회군(回軍)을 저지 대립하다가 실패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 왕조를 건국하자 고려의 구신으로서 출사(出仕)를 거절하고 안산(安山)에 내려와 은거(隱居)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이곳 안산에서 졸서(卒逝)하시니 이분이 안산종문(安山宗門)의 종조(宗祖)이시다. 

이러한 명성과 공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조가 건국된후 외침과 병란으로 자손들은 흩어지고 공의 유택(幽宅)마져 실전되는 비운을 맞았으니 이보다 더큰 우환(憂患)이 어디 있으랴? 

이에 후손들이 유택이나마 찾으려고 백방으로 심묘(尋墓),사문(査問)하던중 2003년 1월 공의 21대손 성록(星祿)이 증빙사료를 찾고, 현지탐문과 사료를 발취하고 안산종문(安山宗門) 회장(會長) 형록(亨祿) 종손(宗孫) 장록(壯祿) 그리고 천장위원들의 무한한 노력으로 2004년 6월 14일 공의 천묘(遷墓)를 완료 하였으나, 비석이 없어 안타깝던중 21대손 창록(昌祿)이 비석(碑石)을 근정(謹呈)하여 오늘에 이르니 천년 풀숲에 가렸던 그 자취를 찾으니 군자봉(君子峰) 남록(南麓) 안산(安山)고을에 공(公)의 유택(幽宅)이 더욱 빛나, 훌륭한 조상, 어제나 푸른 기상과 함께 하리라. 


 

오언(吳彦) 

생몰연대 미상. 고려의 무신. 본관은 동복. 

충익공(忠翼公) 예부상서(禮部尙書) 윤백(允伯)의 셋째아들. 

문명공(文明公) 개성부(開城府) 좌윤(左尹) 천(蕆)의손자. 

공민왕(恭愍王)때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密直司). 병마사(兵馬使). 원수(元帥).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역임했다. 

일본의 해적이 우리나라에 노략질 하러 온것은 유사(有史)이전 부터이다. 그러나 왜구(倭寇)라는 어휘가 쓰여진것은 1350년 충정왕(忠定王)2년 부터이다. 

이해부터 계속되어 처음에는 경상도의 거제(巨濟), 고성(固城)방면에 침입해 오다가 수년후 부터는 전라. 충청. 경기지방 까지 미쳐 수도 개경(開京)을 위협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동. 서해안 각지를 구략하여 피해는 점차 확대하여 갔다. 

공민왕(恭愍王)의 원나라에 대한 반항운동과 원말(元末)의 소란의 여파, 그리고 국내외의 사변에 고려의 병비(兵備)는 도자히 왜구의 침략을 격파할 힘이 없었다. 

공민왕 20년 전후 부터는 더욱 구략이 격화되어 매년 개경은 계엄(戒嚴)되지 않으면 안되어 내륙으로 천도(遷都)할 논의까지 나올 지경 이었다.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이희(李禧)가 상서하여 빈해(濱海)의 백성을 모집하여 수전(水戰)을 익혀 왜구를 막아 보겠다고 청원하여 왕을 감격하게 한일도 있었고, 우현보(禹玄寶)가 오랫동안 폐지하였던 선군(船軍)을 창설한것도 이때의 일이다. 

또  외교적 수단에 의하여 일본정부로 하여금 왜구를 진압시켜 보려고 사자(使者)를 파견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별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때 왜구의 수령 등경광(藤經光)이 귀순해 왔으므로 그를 순천(順天). 연기(燕岐)등지에 거주하게 하여 식량과 토지를 주어 회유정책을 쓰려다가 후환을 두려워하여 유살(誘殺)하려 하였다. 

등경광(藤經光)이 이것을 알아차리고 도망친 후부터 왜구의 침략은 더욱 흉악하게 되어, 종전에는 재물만 약탈해가고 인축(人畜)은 죽이지 않았는데, 그후부터는 부녀자와 유아까지도 닥치는대로 도살하여 전라. 충청. 경상도의 연해지방은 인적조차 드물게 되었다. 

또 왜구는 강을따라 내륙지방에 까지 올라와 근거지를 삼으니 그피해는 막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전국156개 불사에 왜구 퇴치의 기도를 올리게도 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를 당하여 밀직사(密直司) 오언(吳彦)은 문신으로 개경에 있으면서 나라가 망하는것을 볼수 없다하고 왜구토벌을 자청하여 출정한 것이다. 

고려사에서 그의 전적을 보면, 

1379년(우왕5년) 경상도 원수 우인렬(禹仁烈). 배극렴(裵克廉). 박수경(朴修敬). 병마사(兵馬使) 오언(吳彦)이 사주(泗州)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 하였다. 

또 그해 왜적이 반성현을 침범하여 확산(確山) 꼭대기에 올라 목책(木柵)을 세워 방비하고 있는것을 우인렬(禹仁烈). 박수경(朴修敬). 오언(吳彦)이 합세하여 포위 공격하여 이를 탈환하였고, 

또 왜적이 광주(光州)와 능성(綾城지금의 화순) 두현을 침범하니 원수 최공철(崔公哲). 김용휘(金用煇). 이원계(李元桂). 정지(鄭地) 오언(吳彦). 왕승보(王承寶). 도흥(都興)등이 역전하여 격퇴하였다. 

1380년 우왕(禑王 6) 왜적이 사근내역(沙斤乃驛)을 점거 했는데, 원수 배극렴(裵克廉). 김용휘(金用煇). 지용기(池湧奇). 오언(吳彦). 정지(鄭地). 박수경(朴修敬). 도흥(都興). 하을지(河乙沚) 등이 공격 하였으나 패전하여 박수경(朴修敬)이 전사하고 사상자가 500여명 이나 되었다. 

양광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된 오언(吳彦)은, 함부로 침범해온 왜적을 두 번에 걸쳐 크게 무찔렀으나. 한번은 1381년 우왕(禑王 7) 이산수(伊山戍)에서 였고, 또한번은 그다음해 임주(林州)에서 였다. 

고려말 조신(朝臣)간에 신. 구대립이 격심 하였을때 공(公)은 이색(李穡). 변안렬(邊安烈). 최영(崔瑩). 우현보(禹玄寶)등 구세력에 속하여 신세력인 이성계(李成桂).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등과 대립 하였다. 

1392년 공민왕(恭愍王) 4년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善竹橋)에서 격살되고, 그해 7월 이성계(李成桂)가 추대되어 조선왕조를 개국하자 고려의 구신으로서 끝내 신왕조에 붙지않아 비명으로 죽은 사람도 많았고, 산림에 은거하여 절개를 지키고 여생을 보낸 사람도 많았다. 

공의 집안은 3대조 시중 대승(大陞)때부터 개경에 살았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출사를 거절하고 안산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이곳에서 졸서(卒逝)하니 동복오씨 안산파의 종조(宗祖)이다. 

묘소는 시흥군 군자면 원곡리에 있다. 

                     시흥(始興) 인물고(人物考)에 기록(記錄)